기업 '리밸런싱' 열풍 속에 숨겨진 한국 제조업의 위기 신호

최근 기업계에서 자주 등장하는 '리밸런싱'이라는 용어. 원래 투자 은행에서 사용하던 전문 용어가 이제는 대기업들의 사업 재편 전략을 설명하는 키워드로 자리 잡았다. 구조조정이라는 단어보다 부드러운 뉘앙스를 풍기며, 마치 평상시에도 할 수 있는 전략적인 선택처럼 보이게 만드는 마법의 단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녹록지 않다.

리밸런싱은 표면적으로는 자산 구성 최적화를 의미하지만, 실제로는 긴박한 상황에서 내려지는 고육지책인 경우가 많다. SK그룹이 지난해 대대적인 사업 재편에 나서면서 이 용어를 본격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고, 이후 롯데, 포스코, LG 등 주요 그룹들도 줄줄이 합류하고 있다. 화학, 철강, 배터리 등 한국 제조업의 핵심 산업을 둘러싼 환경이 갈수록 악화되면서 선택의 여지가 점점 좁아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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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눈에 띄는 것은 알짜 자산까지 내놓는 기업들의 행보다. SK렌터카와 SK스페셜티 매각에 이어 SK실트론까지 매물로 나온 상황이며, 대치동 토지 매각 계획도 추진 중이다. 이는 단순한 사업 포트폴리오 조정을 넘어 유동성 확보에 혈안이 된 모습으로 해석된다. 중국의 부상과 미중 갈등으로 인한 공급망 불안 속에서 한국 제조업체들은 생존을 위한 몸부림을 치고 있다.

1997년 외환위기의 악몽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당시 IMF 구제금융 요청 직후 대우그룹을 비롯한 주요 재벌들이 줄줄이 무너졌던 역사가 새삼 되새겨진다. 물론 현재 외환보유고나 기간 재무 건전성은 당시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개선됐다. 하지만 문제는 성장 동력이다.

외환위기 당시 한국 경제가 호랑이 같은 청년기에 있었다면 지금은 중년의 위기를 맞은 셈이다. 연간 10% 가까운 고도성장 시대는 끝났고 인구 감소까지 겹쳐 장밋빛 미래를 약속하기 어려운 상황이다."국내 산업 공동화(空洞化) 우려가 현실로 다가오면서 첨단 제조시설 해외 유출까지 거세지는 판국에 과거와 같은 극복 방안으로는 한계가 있을 수 있다."

최근 정치권에서는 경제 성장 논의가 활발하지만 실질적인 해결책보다 구호만 난무하는 경향도 보인다."누구에게 정권이 넘어가든 외환위기를 승계한 김대중 정부 때보다 더 복잡미묘한 과제를 안게 될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빅딜'과 같은 과감한 산업 구조 조정부터 노동 시장 개혁까지 총체적인 접근 없이는 새로운 돌파구 찾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이다."청년기의 실수와 노년기의 위기는 질적으로 다르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리밸런싱이라는 세련된 표현 뒤에 가려진 냉혹한 현실과 진솔한 진단 없이는 진정한 회생도 요원해 보인다는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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